제목 : 조선 최초 스포츠 스타 이영민(12회) 선배 등록일 : 2005-03-07    조회: 882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1950년대 중반 모교 옛 운동장(현 동산의료원 주차장)에서 가끔 교직원이 야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학교 담장과 울타리사이에는 트럭이 지나갈 정도의 비포장 길이 있었다.
타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볼을 쳐내고 했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참 서서 구경하곤 했다. 요즘같은 야구라기보다 흉내내는 정도였다.

1980년대 모교 운동부는 축구, 농구, 유도, 수영, 기계체조 등 교기 5종목이 전국을 제패했다. <유도의 16연승>이라는 화려한 금자탑도 쌓았고 그것이 올림픽 금메달 3개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야구?
2005년 1월 29일자 조선일보 기획 연재물 「야구 100년 인물열전」은 그동안 잊혀진 체 묻혀있었던 또다른 <계성인>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동대문 구장에서 조선 최초 홈런을 날렸다는 이영민(李榮敏, 12회) 대선배가 바로 그분이다.

1905년 12월 대구 신정(新町) 214번지에서 출생(父, 李榮會, 상업)한 이영민 선배는 10세 때 <사립 희원학교>에 입학, 14세인 1919년 3월 31일 졸업했다.
아버지와 형이 세례교인이어서인지 이영민은 1919년 9월 1일 계성학교(5년제)에 입학한다. 기독교로 인한 입학으로 보이나 계성학교 입학 전인 1915년 7월 헨더슨 선교사에게 학습문답을 받기도 하였다.

이영민은 스포츠 만능선수였다. 학교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1학년 때는 한문, 수학, 국어가 80점대였고 3학년때는 체조가 85점으로 국어(88점) 다음이었다.
이런 재질있는 스포츠 만능 선수를 지방에 있게 그냥 두지 않았다. 3학년을 마친 1923년, 배재학교로 스카웃되면서 운동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가 도입된 것은 1902년 평양 숭실학교 학생에게 야구를 가르쳤던 필립 질레트(Philip Loring Gillert) 선교사였다. 물론 이때의 야구는 볼을 주고받는 식이었고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은 1906년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질레트는 야구를 통해 땅에 떨어진 조선 청년들의 기상을 살리려고 했고 YMCA를 통해 야구는 1911년 이후에 전국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야구선수로서 이영민은 1924년 조선중학 선발팀으로 일본원정도 갔으며 연희전문 선수때인 1928년 6월 경성의전(서울의대 전신)과의 정기전(동대문 야구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홈런을 터뜨렸다.
또한 1934년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일본 순회전엔 조선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이영민은 육상에도 뛰어나 연희전문 재학때는 <조선육상경기대회> 400m에서 54초 6이란 조선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뿐아니라 1933년 <경평축구> 정기전에는 경성축구단 감독으로 출전했으며 광복 후 국가대표 축구감독을 역임했다.

이렇게 야구는 물론 축구계에도 깊이 관여한 이영민 선배는 광복 후 대한야구협회이사 등을 역임했으나 1954년 8월 괴한의 피격으로 안타깝게 운명했다.

대한야구협회는 1958년부터 매년 각종 국내고교대회에서 최고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해오고 있어 한때를 풍미했던 조선 최초 스포츠 스타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본고는 조선일보 기사를 서정원(39회) 선생이 동창회로 보내주어 기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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